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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713-8267 (Print)      |      ISSN 2713-8275 (Online)

 

57집 | 한말(韓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의 한시에 나타난 저항과 번민의 일면 - 대구경찰서 투옥 전후를 중심으로 (한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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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문학연구소 작성일20-12-10 17:59 조회1,4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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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일투쟁을 전개한 여러 사대부들 가운데 한주학파의 지도자 이승희(李承熙)가 남긴 한시에 주목한 논문이다. 이른바 상소투쟁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른 기간 동안 창작된 그의 한시는 당시 일본에 적극 투쟁했던 사대부들의 저항의지와 함께 복잡다단한 감정과 고뇌의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약 300여 명의 지역 유림과 함께 상경한 그는 오적을 주살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고종에게 직접 전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직·간접적 저지로 끝내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고 이내 고향으로 내려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 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126(양력 1906119) 수인(囚人)이 된 이승희는 이듬해 47(양력 190651)까지, 103일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상소투쟁에 이은 옥중투쟁의 과정 속에서 그는 당대 대한제국의 상황을 오랑캐였던 원나라에 의해 패망했던 남송 말기의 상황과 비견하며,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송나라의 충신들의 정신에 주목했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면서, 단순한 비관과 한탄을 극복하고 옥중 투쟁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를 떠올리며 저항의지를 견고히 가져갔지만 동시에 보호국 처지가 된 조국의 참담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비탄과 통한 가득한 심사를 시를 통해 표출했다. 출옥의 순간에는 치욕과 굴종만이 가득한 대한제국에서 더 이상 온전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를 내비치며, 해외 망명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일면도 노출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 작성된 그의 시들은 일본에 대한 비분강개한 저항의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비탄과 절망, 감상(感傷)과 회한의 정조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나름의 대안을 모색해야 했던 당대 유림의 절절하고도 치열했던 삶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직면한 시대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그것에 편승하지 않고 대의명분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 몸으로 부딪치며 행동으로 나아갔던 당대 지식인의 실천적 면모를 대단히 잘 담고 있다.

 

 

주제어 : 이승희(李承熙), 『한계유고(韓溪遺稿)』, 한주학파(寒洲學派), 상소 투쟁, 옥중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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