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집 | 소문과 소식, 억압된 기억을 전달하는 두 방식 -80년대 초 하근찬·김원일 소설 교차하여 읽기(임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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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문학연구소 작성일24-11-20 15:07 조회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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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하근찬에 대한 연구는 주로 1950~60년대 초기 단편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가 다시 쓰기를 통해 작품을 계속해서 갱신해 왔던 만큼 하근찬의 소설 세계가 어떠한 노정을 그리며 변화하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중 1980년대 초에 쓰인 『산에 들에』는 이전 시기 하근찬이 민족적·집단적 이야기를 다루던 방식과 차이를 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산에 들에』의 서사적 특징을 분석하고, 다음으로 동시대에 쓰인 김원일의 작품 「환멸을 찾아서」와 비교함으로써, 일면 유사점이 많아 보이는 두 작가의 글쓰기가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어떻게 분기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산에 들에』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서부터 해방에 이르는 동안 한 마을이 처했던 상황을 ‘용길’의 식구를 중심으로 전개해 나간다. 하근찬은 민중을 통제하고 착취하려 하는 폭압적인 식민 지배술과 이로부터 달아나는 민중의 모습을 금붙이와 토속 신앙을 경유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일제 말의 기억을 부조해 낸다. 또 징병이나 징용, 위안부 등 강제 동원으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소문’의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 떠돌게 함으로써, 돌아오지 않은 이들과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부재’로서 드러낸다. 그러나 일제 말 해방을 기다리는 민중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있을지언정 이후 들이닥칠 한국 전쟁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1980년대 하근찬의 글쓰기가 봉착한 한계를 지시하기도 한다.
김원일 역시 유사한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다시 쓰며 소설 세계를 변주해 나가는데, 그가 1980년대 초에 쓴 「환멸을 찾아서」를 읽으면 『산에 들에』 속 공백과 이를 초래한 하근찬의 변화가 더욱 뚜렷하게 감지된다. 특히 하근찬의 작품에서 가족(친족) 혹은 마을 공동체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전달을 보여 주는 데 반해, 김원일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단위를 넘어 기억-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의 차원으로 이야기 전달의 범위가 확대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억압된 역사에서 비롯되는 문제들과 이를 해결할 주체가 두 작가에게서 다르게 상상된 것인데, 이러한 차이에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서 민중과 민족 개념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착종되는 과정이 관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하근찬의 『산에 들에』와 김원일의 「환멸을 찾아서」는 서로를 통해 각각의 작품을 가능하게 한 시대 상황과 조건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이고도 상호텍스트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