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집 | 고토쿠 슈스이와 러일전쟁의 시대 - 고토쿠의 사상 변화의 흐름을 중심으로 -(김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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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문학연구소 작성일25-05-26 10:33 조회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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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는 1910년(메이지 43년)에 형법 제73조의 죄에 의해서 재판에 넘겨지고, 1911년(메이지 44년)에 처형당했다. 당시 고토쿠가 메이지 천황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미야시타 다이키치(宮下太吉) 등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 그가 끼친 영향이 컸다는 점 등으로 인해, 메이지 권력은 고토쿠를 천황 암살 계획의 용의로 검거하였다. 본고에서는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이 ‘대역 사건(大逆事件)’의 중심으로 지목된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과 그의 <직접행동(直接行動)>의 기초와 배경에 대해서 재조명해보는 작업을 행했다.
고토쿠 슈스이는 사상 형성의 중요한 시기인 20대 초반의 시기에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의 이론적 지도자인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에게 사사하며 일생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토쿠 슈스이는 사상적으로는 나카에 조민의 계보를 잇는 급진적 자유민권론(自由民権論)에서 그의 사상의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고토쿠가 사회주의자가 된 시기에 대해서는 1898년 11월 18, 19일에 「사회 부패의 원인과 그 구제(社会腐敗の原因とその救済)」를 『만조보(萬朝報)』에 발표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주의연구회>에 입회한다. 이후 「자유당을 제사지내는 글」을 쓴 후에 1901년(메이지 34년) 4월 9일에 「나는 사회주의자이다」를 『만조보』에 발표한 것을 그 분기점으로 본다. 사회주의자가 된 고토쿠 슈스이의 천황 찬미에 모순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고토쿠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적 경제 제도의 변혁으로만 생각하고, 정치제도의 변혁을 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토쿠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국체(国体)에 모순되지 않는 것이 되며,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자야말로, 오히려 국체에 모순되는 자’라는 것이 된다. 또한, 고토쿠 슈스이는 저서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廿世紀之怪物帝國主義)』를 통해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다시 하고 있으며, 그의 생각은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제국주의의 광풍을 막고자 했던 애국심과 일본 정부의 비도(非道)한 행위에 대한 저항심에서 발로한 사상의 조류라고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을 그의 천황관과 제국주의에 대한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고토쿠의 사상 변화의 흐름과 그 변화의 <총체>로서 도출되는 고토쿠 슈스이라는 인물의 비중, 그리고 그가 당시 일본 사회에 끼친 파장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